수다줌마의 해외 익명 막장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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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구급 대형 게시판 사이트인 Reddit에서
알레르기 얘기만 나오면 회자되는 전설의 글입니다.


안녕하세요.
몇달 전부터 여기* 눈팅은 했었는데,
(*: 기혼자가 엄마/장모님/시어머니 뒷담하는 게시판)
직접 글 써보는 건 처음입니다.
제 심리치료사에게 이 게시판 얘기를 했더니,

'이 게시판에 시험삼아 글을 써보고
심적 고통이 줄어드는지 보자'는 숙젤 내주더군요.

한 일곱번은 썼다지웠다 했는데, 이제 올릴 때가 됐네요.

영어를 30년은 썼지만, 그래도 모국어가 아니라
말이 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긴 글이 될 겁니다.
제가 말을 조리있게 못 하는데다가,
배경설명도 많아서요.

트리거 워닝: 장모가 알러지를 안 믿어서 치른 대가는 아이의 죽음.

2005년 11월 2일 수요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로부터 12년하고도 두 달 13일 전이죠.
2002년에 결혼해, 같은 해 열 달 후에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2004년 5월, 쌍둥이 딸들을 낳았죠.

우리 가족은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가족사진이 구글검색하면 나오는 스톡사진 같았습니다.
제 남편은 엔지니어고, 저는 대학교 교수죠.
도심에 있는 멋진 집에서 살았습니다.
아이들은 행복하며 건강했습니다.
심지어는 Argo라는 골든 리트리버까지 키웠답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전형적으로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지금은 너무 화가 나서 그 시절 사진을 바라볼 수도 없지만요.


쌍둥이 딸들이 태어났을 때, 병원에선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정확히 예정일에 태어났고,
산후 검사도 모두 '문제 없음'으로 나왔구요.
근데 애기들을 집에 데려오고 보니,
딸애들 중 한 애
(4.5분 먼저 태어났으니 '큰딸'이라 부르겠습니다)
가 자꾸 두드러기가 생기는 겁니다.

우리 아들도, 내 가족친척들도 알러지는 없었기에,
전 이에 대처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뭔지를 몰랐어요.
그냥 '얘도 나처럼 피부가 민감한가보다' 했죠.
전 특정 종류의 천을 몸에 못 대요.
피부가 엄청 건성이라, 한 번 피부가 거부하면 두드러기가 돋거든요.
그래서 섬유유연제 사용을 그만뒀죠.
가장 부드럽고 편안한 침구와 옷을 샀습니다.
나중엔 아예 제가 아기옷을 손수 지어 입혔어요.
옷 제작 공정 중의 무언가가 큰딸이랑 안 맞나 싶어서요.

소아과도 몇 번 갔고, 의사들은 무언가의 알러지 반응이라고 했는데,
모든 알러지 검사가 음성으로 나왔어요.
무슨 성분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건지 알아낼 수가 없었죠.

알러겐을 찾아내는 데에 3달 넘게 걸렸습니다.
그 기간동안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죠.
나중엔 큰딸은 그 병원 역사상
청정실(clean room)에 가장 오래 있었던 아기가 됐습니다.

거기서 나오고 1분만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곤 했으니까요.
그때쯤엔 우린 온갖 것에 '제거 요법'을 시행중이어서
절의 승려에도 지지 않을 만큼 단촐한 생활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아들과 둘째딸을 시부모님께 맡겼습니다.
일상 속의 모든 것을 제거해야 큰딸이 뭐에 반응하는 지 알아내야 했으니까요.
비누, 샴푸, 데오도란트, 세제의 사용을 그만두었고,
그 다음은 음식 차례였죠.

3개월이나 걸렸지만, 결국 알아냈습니다.

우리 큰딸은 코코넛 알러지였어요.
의사들 왈, '코코넛 알러지는 드물어서 알러지 검사 목록에 없었다'라나요.
뭐에 알러지가 있는지 결국 찾아냈을 땐,
우린 너무나, 정말이지 너무나 안도했습니다.
그러나 안도감과 동시에, 전 히스테리칼한 웃음을 터트렸죠.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날 정도로요.

저는요, 거의 신앙처럼 코코넛을 쓰는 문화권 출신입니다.
요리에도 넣고, 종교행사 때 코코넛 열매를 까며,
모든 달콤한 간식에 코코넛이 들어가고,
거의 모든 것에 코코넛이 쓰이는...
제가 웃은 이유는, 제가 코코넛의 어느 한 용도를 엄청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때, 거의 십대 중반 즈음까지,
엄마는 제 머리칼에 늘 코코넛 오일을 바르곤 했습니다.
전 그게 싫었어요. 머리가 엄청 떡져보였거든요.
내 머릴 내가 하고서부턴 절대 안 발랐죠.
제가 평생동안 싫어한 한가지 것에
내 딸이 알러지가 있단 사실에 박장대소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도 웃었고,
제 지인들도 제가 코코넛오일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니까 웃었죠.

엄마 역시 그 얘길 듣고 웃었습니다. 농담조로

"뱃속에서부터 니가 '코코넛오일 싫어싫어' 하는 소리 듣고 따라하는 거 아니니?"
라고 그랬죠.
우린 재밌게 잘 웃고, 그걸로 끝이었어요.


그 땐 엄마가 농담하는 건줄로만 알았습니다.

엄마와 나 사이는 늘... 잘 해 봐야 말싸움인, 그런 관계였습니다.
나름 잘 지냈지만, 의견이 결코 안 맞는 부분이 있었죠.
엄마는 '전통적인 딸'을 원했습니다.
신앙심 깊고,
좋은 대학에 간 결과는 소위 '취집'이고,
혹은 부모가 골라준 남자랑 결혼해서(제 문화권에선 흔한 일입니다),
애를 둘 낳고, 친정 근처의 교외에 살며,
자신처럼 가정주부가 되는 그런 딸이요.

전 신앙심과는 거리가 멀고, 학부학위가 2개에,
석사과정을 밟았고, 박사학위가 있고,
27살까지 결혼을 안 했고(제 문화권에선 늦은 편이죠),
제 부모가 사윗감으로 바라는 타입과는 정 반대의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게다가 워킹맘에, 친정엄마에게 손주 좀 봐달라고 부탁할 필요도 없었죠.
우리 부부는 유모를 고용할 만큼 충분히 돈을 버니까요.

엄마는 날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내 출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즐겼지만,
나는 늘 엄마가 내가 지금과는 좀 다른 딸이었길 바란단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우리 모녀관계의 본질이었어요.
우리 사이엔 "안전한" 대화 주제가 꽤 많이 있었지만,
내 커리어나 정치 등 조금이라도 진지한 얘기는 절대 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나한테 화낸 건 아니고, 그냥 관심없어해서요.
나는 신나서 얘기하는데 상대는 아무 관심없어하는
그런 대화를 이어나가는 취미는 없거든요.

아이들 육아에 있어서, 엄마는 늘 99.9% 찬성이었습니다.
한 발 물러나, 제 모든 결정을 존중했지요.
가끔 맘에 안 들어하는 점도 있었지만요.
(예를 들면, 아이들을 모태신앙으로 키우지 않는 점이라든가요.
근데 전 그래도 애들을 공동체 모임에 데려가서
자신의 뿌리를 알게 했고,
엄마도 애들한테 기도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어요.)

유일하게 엄마가 계속 잔소리한 점이 코코넛오일이었습니다.
딸들은 둘 다 억센 곱슬머리였습니다.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어요.
남편과 저는 둘 다 클립을 꽂아도 흘러내릴만큼 직모거든요.
좀 헝클어진 편이긴 하지만, 얼마나 예뻤다구요.
근데 엄마는 늘

"기름을 조금만 바르면 컬이 부드럽고 정돈될 텐데"
랬죠. 전 안된다고 했고요.
물론 다른 종류의 머릿기름도 있지만
딸들은 아직 어리고,
알러지로 오래 고생한 경험 탓에
우리의 일상생활에 새로운 물질을 추가하기가 두려웠거든요.

이유도 분명 엄마한테 설명했어요.
엄마도 우리가 큰딸의 알러지로 고생한 과정을 다 알고요.
병원에 있을 때 음식과 옷을 몇번이고 갖다준 것도 엄마였어요.
알러겐일 가능성이 있는 모든 물질을 제거할 때,
집안의 온 가구와 옷을 들어내는 작업을 도와준 것도 엄마였고요.
성분을 하나하나 배제하고 애들 음식을 만들던 시기에
기본재료부터 시작해서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도 엄마였습니다.
엄마는 우리 큰딸의 고생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까지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가요.


2005년 11월 2일:

저는 그 날 스케쥴상 학생들에게 중간고사를 치르게 한 후,
밤 늦게까지 연구실에 있어야 했습니다.
제 남편은 컨퍼런스에 참석하러 떠나 있었고,
우리 유모는 독감으로 넉다운된 상태였죠.
그래서 그 날은 엄마를 불러다 애들을 봐달라 했죠.
당시 아들은 거의 세살, 딸들은 한 살 반이었습니다.
친정부모님이 자고 가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전혀 없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애들은 늘 행복하고, 잘 돌봐진 채로 돌아오곤 했으니
저는 별 고민없이 애들을 친정 부모님과 함께 두기로 했습니다.

점심식사 후에 나와 통화했고, 오후 5시쯤에 영상통화를 했죠.
애들은 모두 행복하고 건강했습니다.
그 날 10시 반쯤에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전화해
애들이 잠들었는지 확인하고, 잘 자라고 인사했습니다.
애들이 보고싶었지만, 이미 잠자리에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엄마랑만 잠깐 통화했는데,
엄마도 일찍 잠자리에 드는 타입이라
곧 끊고 저도 잠자리에 들었어요.

다음날, 아침 6시에 공항에 도착하는 남편을 마중나가기 위해
오전 5시에 일어났습니다.
같이 아침을 먹고, 애들을 픽업하러 가기로 했죠.
남편과 합류하니, 우리 둘 다 배가 별로 안 고팠어요.
그래서 그냥 애들을 데리러 가서
부모님도 모시고 모두 함께 아침(혹은 브런치)을 먹는 게 좋겠다 싶었죠.

친정 부모님 댁엔 아침 7시 45분에 도착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거기 안 계셨어요.
아들은 이웃집에 있다가,
자기 엄마아빠의 차가 멈춰서는 걸 보곤 이웃 여자와 함께 달려나왔습니다.
히스테리칼하게 우는데, 전혀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전 긴장했습니다.
그 땐 제 부모에게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난 줄로만 알았죠.
이웃사람 말로는, 자기도 무슨 일인지 잘 모른대요.
다만 아침에 구급차가 우리 부모님 댁에 왔고,
내 아버지가 달려와 이웃 일가를 깨우곤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 아들 좀 봐 달라고 했대요.
물론 그들은 승낙했고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서, 계~속 부모님께 전화했습니다.
아들애는 여전히 울고 있었지만, 좀 진정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은 못 했어요.
그 다음은 저도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어찌어찌 구급차가 근처의 X병원으로 갔단 걸 알아냈고,
신호위반 몇 번 해 가며 거기 도착했죠.
병원에 도착해, 앰뷸런스 전용 비상입구로 진입해서
차는 거기다 두고 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간호사들이 무슨 일인지 물어봤습니다.
그때쯤엔 제가 남편보단 더 침착했습니다.
"저도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쌍둥이 딸들과 내 부모님이 이 병원에 온 것 같아요."
라고 했죠.
그 때 그 간호사의 표정을, 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내가 누군지 안 그 순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죠.
다른 간호사가 우리 부부를 빈 방으로 안내해,
가족을 찾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의사와 얘기 좀 하자고 했습니다.

그 전날 밤, 애들이 자기 전에 놀 때,
엄마가 딸들 머리에 코코넛오일을 바른 겁니다.
애들은 엄마가 머리를 매만져주는 걸 좋아했고,
엄마한테 머리를 땋아달라고 했죠.
더 매끄러운 댕기를 만들겠답시고,
코코넛오일을 발랐대요. 두 딸 모두에게.

우리 아들 말로는,
내 엄마가 머리를 해주는 동안
큰딸이 가벼운 어지럼증과 가려움을 느꼈고,
엄마는 그 애에게 어린이용 항히스타민제를 먹였다는 겁니다.
그 약을 먹으면 애가 졸려합니다.
어차피 곧 잘 시간이니까 잠자리로 갔고요.

큰딸이 가벼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면 그 약을 주곤 했거든요.
어쩌다가 극미량의 코코넛에 간접노출 되었단 소리니까요.
그리고 즉시 애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씻겨서
행여 남아있을 코코넛 분자를 제거하곤 했습니다.

근데 엄마는 애한테 약만 달랑 주고,
그놈의 빌어쳐먹을 코코넛 오일은
그냥 머리카락에 묻혀둔 채로 애를 재웠습니다.
항히스타민제가 졸음을 유발해,
큰 딸은 잠에서 깨거나, 자기 오빠를 깨우거나,
울 만큼 의식이 또렷하지도 못했습니다.
큰딸은 자면서 토했고,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았습니다.
그 작은 몸이 원래 크기의 두배까지 부었습니다.
자면서 질식사했습니다.
새벽에,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엄마는 아침 7시에 애들이 잘 있나 확인하려다가 그걸 알았습니다.
그 때엔 이미 죽어 있었죠.
엄마는 비명을 질렀고, 제 아버지를 소리쳐 불렀고,
그 때가 병원으로 향한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코코넛 오일을 바른 걸 몰랐습니다.
엄마한테 듣고서야 알았죠.
저는 오늘날까지도 아빠가 그렇게까지 화난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병원에서 마주친 아버지는 분노 때문에 엄마 얼굴을 못 봤고,
부끄러움 때문에 내 얼굴을 못 바라봤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구할 방법이 있길 빌며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내 아버지는 작은딸에게도 가벼운 알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작은 딸도 검진받게 했지요.

아직도, 우리 부부가 느낀 감정을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 딸을 보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게 기억납니다.
그 애가 죽었을 리가 없어. 이건 그냥 매우, 매우 끔찍한 악몽이야.

이후 이어진 나날들에 대해선 아직도 털어놓질 못 합니다.
얘기하려고 하면 제가 망가지는 게 느껴지거든요.
장례식, 다른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기, 등등...

엄마르 비롯해 온 가족이 경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제 나라에도 아동보호법이 있어서,
정부에서 우리 부부가 애들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의심하는 바람에
아이들의 양육권을 잃을 뻔 했어요.
남편과 저는
하필 이런 시기에 애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놓는 건
최악의 선택임을 증명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엄마는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서류상으론 이혼하지 않았지만, 엄마를 떠났습니다.
엄마 친정가문의 대부분은 엄마와 절연했습니다.
그나마 엄마랑 이야기하는 몇몇도 최소한의 접촉만 하지요.
지금 엄마는 작은 마을에서 혼자 사는데, 몇 달에 한번 꼴로 나한테 전화해서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없었다, 제발 용서해줄 순 없겠니"
같은 소릴 합니다.
우리 집에 방문하고 싶어해요.

내가 엄마한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우리 집에 방문하고 싶으면, 딸애도 같이 데려와."뿐입니다.

13년이 흘렀습니다.
첫째 아들은 올해 면허를 땄고,
작은딸은 곧 고등학생입니다.
둘 다 건강하며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중이지만,
둘 다 큰딸이 죽기 전과는 달라졌습니다.
큰아들은 둘째딸을 엄청 보호하려 들고,
무례를 절대 참지 않습니다.
둘째딸은 에너지가 넘치고 수다스런 꼬맹이었는데,
지금은 조용합니다. 말 소리가 너무 작아서 집중해야 하죠.
둘째딸은 몇년 전에 제게 말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건 자기가 애기 때 일인데,
여전히 늘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고요.
자신의 일부가 사라진 것처럼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남편이 아니었다면 단장의 아픔으로부터 결코 회복하지 못했을테죠.
우린 서로를 도우며 딸을 애도했습니다.

심리상담을 10년 넘게 받고서야 이렇게 글이 써지네요.
이 모든 걸 타이핑하며 뭘 기대했는디 저도 모르겠지만,
이 게시판의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듯
저도 그런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알러겐인지 뻔히 알면서 먹었다가
응급실을 가는 자폭을 해서요.
스스로를 다잡는 의미에서 번역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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